Peeping @the World

호주 서부를 보다 1: 시작이 비뚤배뚤

WallytheCat 2018. 11. 21. 18:01

Peeping@theWorld/Days Traveling 2008/05/29 01:25 WallytheCat


이십대 적, 친구들과 여행을 가겠다고 하면 그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은 언제나 판에 박은 듯 같은 대사였던 걸로 기억된다. 이해가 될 만한 앞뒤 설명 한 마디 없이 "계집애가 어딜 나다니냐"는 식이었다. 그 간단한 세 어절짜리 표현 속에 든 유교의 남존여비 사상을 함축한 듯한 '계집애'란 명사와 존중이라곤 조금치도 엿보이지 않는 '나다니다'란 동사는,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했으나 인정받지는 못한 데서 오는 내 반항심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다분히 공격적이고 압력적인 그 한 마디에 스스로 꼬리를 내리며 포기했던 적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쪽지 한 장 남겨 놓고 일단 떠나고 보았던 것 같다. 물론 다녀온 후 그 후유증을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이 여행 내내 따라다니긴 했지만, 여행에의 유혹을 물리치진 못했으리라.

두어 달 전 호주 서부에 있는 도시 퍼쓰(Perth) 행 비행기표를 끊을 때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던 여행이 막상 학기말이 다가오자 점점 '불가능'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급하고 초조해지던 분위기가 결국에는 내 보스의 "갈 수 없다. 가서는 안 된다."는 단정적 명령조의 표현으로 이어졌을 때, '꼭 가야 할 여행이구나'란 청개구리 시절의 다짐이 자연스럽게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내 보스의 단 한 마디가 불가능해 보이던 여행을 가능하게 해 준 셈이니 감사하게 여겨야지 싶다. 어느 날, 그 날의 구루로 자처하던 한 동료의 '새로운 여행지에서의 새로운 상황이 변화하며 겪게 될 새로운 경험을 위해 무조건 떠나라'는 격려도 한 몫 하긴 했다. 며칠 밤샘을 해가며 성적을 마쳐 놓고, 밤 비행기에 올랐다. 거의 야반도주 같은 거였다. 몹시 피곤했던지 열한 시간 내내 잠을 자다 일어나 보니, 낯선 나라 호주, 새로운 도시 퍼쓰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실컷 자고 일어나니 공항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온화한 환영이 아니라 미국 시카고 한국 영사관에서 제대로 만들지 않은 내 오래된 여권에 대한, 친절을 가장한 집채 만한 의심이었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스캔이 되지 않아 에러가 나는 내 여권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는 있었으나 다른 모든 여행지에서는 별 문제가 없던 거였다. 하지만 호주에서는 달랐다. 확실하게 가짜 여권으로 의심을 받아 곤욕을 치러야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 여권은 내가 봐도 좀 가짜 같긴 하다. 전혀 스캔이 안 되는 나달나달 해진 페이지도 그렇고, 고무 도장도 없었는지 아부다비 한국 대사관 누군가가 어린애 같은 필체로 적은 여권 기한 연장 날짜는 영락없이 내 여권이 가짜라고 말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가짜 여권을 만들어 호주로 드는 중국 여인네들과 단속이 심해져 한국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한국 매춘부들이 호주로 많이 드는 이유로, 그 비슷한 카테고리에 들어 보이는 동양 여자들의 여권에 대한 검사가 철저하다는 거다. 한국 매춘부라니, 이 부류에 들 나이는 이미 지난 거 아닌가. 할 말은 아니다만, 포주라면 몰라도. 한국 매춘부 부류가 아니라면 아무래도 가짜 여권을 소지한 중국 여인네 부류에 들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태어나 처음 든 나라에서 처음부터 이런 대접을 받는 게 기분이 나쁘다, 좋다를 떠나, 아직 덜 깬 잠과 범벅이 되어 묘했다.  

그곳을 지나 검색대에서의 또 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호주 공항의 검역, 검색이 철저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좀 심하다 싶을 정도였다. 이미 신고까지 한, 간식으로 가져간 비스켓 두 봉지, 컵라면 세 개를 이 잡듯이 뒤지며, 한글로 써있는 컵라면의 재료 난을 번역해 달라고까지 했다. 그녀에게 읽어주며 컵라면에 그렇게 많은 종류의 음식 재료와 화학 물질이 든지는 나도 처음 알았다. 그 수십 가지 성분을 성실히 다 읽어줄
만큼 나도 완전히 순진하진 않다. 소맥분, 고추가루, 건조 파 등 들어서 무사할 듯 싶은 성분만 대충 읽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후일 내 비상 식량이 될, 별 것도 아닌 음식물 다섯 개체는 무사히 지켜낼 수 있었다. 아, 비장도 하여라.

어려운 과정을 거쳐 나온 공항은 시골 간이역 만큼이나 작아 허무할 정도다.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낮 기온 섭씨 40도인 곳에서 열한 시간 쯤 날아 오니 가을을 맞아 섭씨 17도가 되어 있다. 옷깃을 여미며(아, 나도 이런 말을 쓰게 될 줄이야) 셔틀 버스를 기다리며 공항 앞에 서 있으려니 퍼쓰의 짧은 가을 해가 공항 건물 뒷편으로 서둘러 기울고 있었다.


<Friday 5/16/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