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인 듯 안개인 듯
Peeping@theWorld/Days Traveling 2009/09/13 02:01 WallytheCat
내 딴에는 학비에 보탬이 될까하고,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근로장학금이란 걸 신청했었다. 설거지 정도야 식사 후 잠시 하는 가벼운 일쯤 되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시도한 일이었다. 허나 내 몸통 반쯤 되는 크기의 대형 냄비며 팬들을 닦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 냄비에 몸을 거의 들이밀어 넣어야 그 속을 닦는 게 가능했다. 뜨거운 비눗물과 땀에 온통 엉망이 된 꼴은 그렇다 치더라도, 설거지를 하느라 수업은 수업대로 자주 놓치고, 알루미늄이 배어 시커멓게 변한 옷들은 다시 입을 수도 없으니 모두 버려야 했던 일은 황당하고 막막했다. 그 상황에 서럽기는 또 어찌 그리 서럽던지... 한 번에 한 가지씩 밖에 할 수 없는 체력과 정신력을 가진 나로서는, 비행기씩이나 타고 공부하러 갔던 게 별 의미가 없게 되어버린 시간이었다.
피할 수 없던 설거지 일과 함께 초저녁이면 꽁지에 라임색 형광 불을 달고 나타나 온통 내 시야를 점령하며 꾸벅꾸벅 인사를 하던 콩쥐 친구 반딧불이들, 짙고 깊은 초록 숲, 여러 사람이 같이 써 몹시 불편하던 샤워실과 방, 그 잠깐의 만남 속에서 연애질들을 하느라 공부는 뒷전이던 청춘 남녀들의 울고 웃던 이야기들, 뭐 그런 것들이 아직 내 기억에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 밥(Bob)이라 불리던 '나, 착실' 이마에 이렇게 써붙인 것 같던 곤석이 양다리를 걸치고 연애를 하다 그 삼각관계 스캔들에 캠퍼스가 들썩했던가.
내가 잠시 인연을 맺었던 곳이니 추억을 되새기라는 배려로 남편은 나를 그곳에 데려다 주었던 모양이다. 그곳에 대해 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시큰둥한 나를 보고는 좀 김 빠져 했다. 그래도 덕분에 묵은 기억들을 잠시 떠올리지 않았는가. 어쨌거나... 이 여행 길에 뜻하지 않게 맥도날드집 신세를 많이 지다가, 에쉬빌에 가서 우연히 괜찮은 일식집을 찾아 저녁을 먹을 수 있던 수확도 있었으니, 꼭 여정의 낭비라고만 할 수는 없겠다.
다음 날 아침, 물이 잘 안 빠지는 욕조 상황에 관해 적은 쪽지를 호텔 직원에게 건네며, 다음 손님을 위해 신속한 조치를 취하기 바란다고 했더니만, 사과나 감사는 쏙 빼고 알았다고만 한다. 도대체 서비스를 팔아 먹고 사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기본 예절은 어디다 삶아 먹은 건지 원. 사과를 하면 호텔비를 깎아줘야 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뒤늦게 그런 걸 이유로 호텔비를 감해 준다면야 거절할 나는 아니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일단 미안하다고 해야하는 것 아닌가?
애쉬빌에 관한 자질구레한 기억들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비에 모두 묻어버리기로 하고 그곳을 떠났다. 애쉬빌부터 오하이오까지 이어지는 23번 도로를 따라 하루만에 집에 도착한다는 다소 무리한 계획을 갖고.
오락가락하는 빗속을 삼십여 분 달렸을까. 스모키 마운튼에서 이어지는 블루 리지 산(Blue Ridge Mountains) 자락이 눈앞에 병풍처럼 펼쳐진다. 스모키 마운튼에 대한 내 아쉬운 마음이라도 달래주듯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안개와 구름을 산 허리에 잔뜩 휘감아 두른 채.
이곳에서는 이런 장관이 자주 펼쳐지는 모양이다, 누군가 고속도로에 이렇게 근사한 산책길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니. 이곳에 멈춰서서 마음에 담은 풍경 덕에 스모키 마운튼에 대한 미련을 아낌없이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곤 계속 달려 오하이오 강을 건너고, 평평한 땅이 이어지는 오하이오 집으로 돌아왔다, 집 떠나면 고생이여, 이러며. 밤 늦게 뒷마당에 불을 피우고 앉았다. 또 아마도 잠시, 물 잘 빠지는 내 집 욕실에, 익숙한 잠자리에, 익숙한 음식에 감사하며 지낼 것이다. 그 '잠시'가 얼마나 갈지는 그저 두고 볼 일이지만서도.
<Sunday 8/2/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