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s in UAE

와스다

WallytheCat 2018. 11. 22. 00:16

Peeping@theWorld/Days in UAE 2009/11/17 03:09 WallytheCat


열흘쯤 전인가 보다. 목요일 오후, 모두 주말을 시작하기 위해 슬금슬금 귀가를 하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서류를 복사하는 일, 서류를 기계로 바인딩 하는 일, 학교 본관을 왕래하며 서류를 배달하는 일, 문구 조달, 심지어는 학장이나 손님들의 차를 대접하는 일까지도 도맡아하는 에이치 씨가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내게 낯선 사람 하나를 소개해 준다. 숱 많은 머리카락이 온통 하얀 낯선 사내는 파키스탄 전통 복장인 긴 흰옷까지 입고 있어, 영점오 초만에 외모만으로 판단을 할라치면, 깊은 사막에서 도를 닦다 홀연히 속세에 나타난 도인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 좋은 환한 얼굴로 사람을 맞는 그에게 단박에 호감을 가진 건 물론이었다.

사막도인: "작업실 주위에 잔디도 깔고, 가장자리에 꽃나무도 둘러 심어 드렸는데, 마음에 드셨나 모르겠네요."
사막속인: "마음에 들다 마다요. 정말 감사합니다. 정원이 너무 아름다워져, 그 건물이 더 형편없어 보이긴 하지만요. 아예 새 건물도 지어 주실래요?"

뭘 어쩌라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내 쓰잘데 없는 넋두리에도 그는 여전히 얼굴에 한가득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의 웃음은 눈부시기까지 하다. 

사막속인: "근데 이 대학 정원을 관리하시는 분인가 보죠? 날이 더워 정원 관리하는 일이 쉽지 않을텐데, 정말 수고가 많으시네요."
사막도인: "이 대학 뿐만이 아니라 7km 거리에 달하는 이 대학촌 전체의 정원을 관리한답니다."
사막속인: "그렇게 중요하신 분인 줄 미처 몰라 뵈었네요. 저희 작업실 정원 뿐 아니라, 다른 캠퍼스에 사는 저희집 정원 관리까지 해주시는 거니, 정말 감사드려요."
사막도인: "사시는 빌라 번호를 알려주시면, 특별히 관리해 드리지요."
사막속인: "정말이요? 뭐 그러실 필요까지... 근데 요즘 저희집 나뭇가지들이 웃자라 그 그늘 탓에 잔디가 다 죽어버리긴 했어요. 나뭇가지도 치고, 거름흙도 좀 뿌리고, 새 잔디도 깔면 좋긴 하겠지요. 그리고 앞마당의 제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무 한 그루도 베어주시면 좋겠구요."

순전히 청탁성 성격을 띤 수다를 거기까지 떨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셋이서 남자 화장실 문 바로 앞에서 그러고 있는 거였다. 그러니까 사내는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들어가려던 순간, 그 앞에서 우연히 나를 만난 모양이다. 그제서야 상황을 눈치챈 나는, 서둘러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얼마나 급했을꼬...

그런 류의 수다는 예서 흔하게 있는 일이니, 돌아서면 그저 잊어버리고 말 일이었다. 내 일상의 무대가 무대니 만큼, 자칭 타칭 높다는 지위로 위세를 부리며 등장하는, 내게는 전혀 현실감이 없이 추상적이기만 한 인물들은 많이 만나 왔지만, 대학촌 전체의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니, 그 누구보다도 우러러보였다. 이곳에서 그 어느 높다는 자리도 부러워해 본 적 없는 내가, 그날 사막의 도인처럼 홀연히 등장한 그 사람의 일자리에 대해서는 왠지 큰 관심까지 드러내며, 무척이나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거였다.

이틀 후, 주말이 다 끝나가는 토요일 늦은 오후, 정원 중간 관리자쯤으로 보이는 낯선 사내 둘이 내 집엘 찾아왔다. 돌아서며 이름도 잊어버린, 그날 그 도인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 집의 정원을 특별히 돌봐주라는 말씀을 듣고 왔다"는 거였다. 난데없이 내게 넘치는 특별한 보살핌이라니. 도인은 잊지도 않고 정말 사람들을 보내왔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다시 한 번 상세히 설명했다.

그로부터 닷새 후 아침, 뒤뜰로 난 유리문에 달린 커튼을 열어 젖히자 이런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또 다시, 아무 연락도 없이 느닷없이 나타난 정원사 서너 명이 마당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성했던 가지들은 말끔하게 다듬어지고, 산더미 같이 쌓였던 그것들은 곧 치워졌다. 고마운 마음에 작은 돈을 그들 손에 쥐어주긴 했지만, 아직 도인에게는 고마움을 전하지 못했다. 그의 이름도 성도, 연락처도 내 기억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발등에 떨어진 급한 일 마치고 나면, 수소문해 찾아 작은 선물이라도 드려야겠다.



아랍어에 '와스다'란 말이 있다. 달랑 몇 개의 단어로 제한된 내 아랍어 어휘 수준으로 볼 때, 얼마나 중요한 단어이면 오자마자 아랍어에 별 관심도 없던 내 머릿속에 입력이 되었겠나. 아랍 사회에서도 그 어디에서나처럼 그런 게 없이 사회 생활하기 쉽지 않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와스다'를 굳이 우리말로 해석해 전하자면, 배경 같은 거라 할 수 있겠다. 혹은, 힘주어 발음해야 그것 없는 자의 설움을 대변하는 느낌으로 온전하게 와 닿는 것 같은 '빽'이란 콩글리시 단어와도 상통한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나는, 남자 화장실 앞에서 우연히 만나 기꺼이 내 '와스다'가 되어주기로 자청한 사막의 도인으로부터 뇌물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와스다' 덕을 톡톡히 보았다.

<Thursday 11/12/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