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eping @the World

요르단 여행 7: 유령만 남은 도시, 제라쉬

WallytheCat 2018. 11. 21. 01:04

Peeping@theWorld/Days Traveling 2007/05/12 23:00 WallytheCat


암만에서 북으로 향하면 차로 한 시간 이내 거리(41.6Km)에 고대 도시 제라쉬(Jerash)가 있다. 고대 제라쉬는 헬라어로 게라사(Gerasa)라 부르던 것을 아랍시대 이후 제라쉬로 부르기 시작했다 한다. 중동 지역에서 고대 로마의 유적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라 유명하기도 한데, 3,000년 이상의 긴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말이 쉬워 3,000년이지, 청동기시대부터 이어진 그 파란만장한 역사의 흔적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뒷 이야기를 남기고 있겠는가.

예수께서 정신병자를 고친 도시라고도 알려진(마르코 5: 1-20) 이곳은 예수 당시만 해도 18,000명 정도가 살았다 한다. 먹고 먹히던 침략의 역사 와중에도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이어오던 이곳은 747년에 큰 지진으로 인해 대부분의 석조건물들은 무너져 흙더미에 파묻혔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아랍인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나, 1122년 십자군 볼드윈 3세에 의해 파괴되었던 것을 19세기 한 탐험가에 의해 발굴이 시작, 1920년대 이후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어 오늘날의 모습까지 복원되었다. 지금도 맞춰지지 않은 돌무더기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다.

남쪽에 매표소가 있는데, 그곳을 지나면 바로 보이는 곳이 로마 하드리안 황제 개선문이다. 하드리안은 그의 발길 지나던 곳마다 이런 개선문을 지었나 보다. 그가 지으라 명하기 이전에, 그의 권력 아래 빌붙던 자들이 미리 알아서 축성해 넙죽 바쳤을 것이란 짐작이 쉽게 드는 대목 아닌가. 문에 든다, 입성하다, 란 문의 상징성에 집착한 그들의 행적도 흥미롭다.


<Hadrian's Arch, AD129>


남쪽 언덕에서 바라본 고대 도시 제라쉬의 모습이다. 거대했을 도시의 규모가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지금 발굴된 것만 20만 평이라는 데, 번성했던 시기의 크기는 그 두 배쯤으로 추측된단다. 잘 설계된 직선 도로, 완벽한 하수도 시설, 일천 평이 넘는 대형 목욕탕 두 개, 두개의 야외 원형 극장, 여러 신전들, 비잔틴 교회들, 대형 경마장(Hippodrome) 등, 큰 도시가 갖춰야 할 것은 다 있어 보인다.  



타원형 포럼(Oval Plaza 혹은 Forum으로 불림). 그 형태가 타원형인 것이 독특한데, 긴 쪽이 90m, 좁은 쪽이 80m로, 크기까지 하다. 대부분 포럼의 기능은 시장이나 만남의 장소인데, 이곳은 막시무스 도로를 따라 북에 이르면 만나는 제우스 신전과 연계되어 희생의 장소로도 쓰이지 않았나 싶단다. 바닥이 석회암으로 잘 포장되어 있다. 다시 맞춰 세워진 56개의 기둥은 이오닉(Ionic) 스타일로, 다른 기둥과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워 보인다. 



도시를 남북으로 반듯하게 꿰뚫는 800여 미터 길이의 열주대로(Colonnaded Street). 막시무스 도로라고도 하는 이 주 도로는, 원래는 기원후 1세기에 지어졌지만 세월을 거듭하면서 새로 디자인되기도, 보수되기도 하며 쓰였다. 이 도로를 걷다 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배수용 맨홀들이 보인다. 한 때 500여개쯤 되던 기둥들은 건물들의 높이에 따라 높낮이가 다양했다고 전해지며, 지금 보이는 기둥들은 1960년대에 다시 맞춰 올려진 것이라 한다.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바라보면, 딸각딸각 말발굽 소리내는 마차가 금방이라도 다가올 것만 같다. 많은 부분을 상상으로 펼치니 더 아름다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 차라리 비어있으니 아름답다. 지금도 이곳이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도시였다면 내가 예까지 발길을 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니, 여행객들만 찾게 된 고대 도시와 지금 이 순간에도 치열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을 현대 도시가 묘한 대조를 이루며 공존하는 게 보인다. 이쪽은 오래된 기억과 추측만이 춤을 추는 텅빈 곳이요, 저쪽은 나날이 역사가 새로 쓰여지는 사람들로 꽉 찬 곳. 오랫동안 바빴을 테니 지금은 땅을 좀 쉬게 하는 것도 좋겠다. 이천 년의 기억을 모두 품었을 기둥 옆 그늘에 앉아, 목마르고 허기진 나는 사과 하나를 꺼내 나눠 먹는다.


여기는 어딘가. 아마도 교회 앞, 분수대가 물을 뿜으며 도시의 활력을 더해 주던 곳 아닌가 싶지만 확실하단 답을 하기에는 좀 망설여진다. 



쌓아 놓은 돌벽돌 사이사이를 비집고 나온 야생화들이 자태를 뽐낸다. 이천 년쯤 된 돌무더기 유적들은 그 꽃의 자양분이 되어주길 마다하지 않고 불평없이 서 있다. 불평할 게 뭐 있겠는가. 지루하게 세월만 삼키고 있다가 날아든 꽃씨들이 반갑기만 할테지. 이건 기생이 아니고 공생으로 봐야 한다. 



도시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게라사의 수호여신 아르테미스를 위한 신전 기둥들이 푸른 하늘을 향해 뻗치고 서 있다. 


<Temple of Artemis>

남쪽에도 원형 극장이 하나 있지만, 북쪽의 이 극장이 훨씬 더 짜임새가 있어 보여 마음에 든다. 조용히 앉아 극장의 구석구석을 들여다 볼까 하는데, 난데없이 한무리의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든다. 학교에서 단체로 유적 답사차 온 모양이다. 수다스러운 것이 어디나 같다. 머리엔 스카프를 둘러 썼지만, 넘치는 에너지는 감출래야 감춰지지가 않는 모양이다. 용감하게 무대에 올라 노래도 하고 소리도 지른다. 우리 일행이랑 사진을 찍자고 다가온 아이들도 있었다. 



맞추지 못한 퍼즐처럼,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뒹굴고 있는 돌들이 많다. 맞춰 올려진 조각들도 건드리면 무너질 것만 같이 아슬아슬해 보인다. 얹혀진 돌들이 마치 다 타고 남은 연탄같이 생겼네.


암만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다 본 풍경이다. 물도 보이고 숲도 우거지다. 이 그림만으로야 중동에 있는 사막의 땅이라곤 상상하기 힘들지 않은가. 늦은 오후, 느긋하고 나른한 동양화, 아니 중동화가 한 폭 산자락을 끼고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