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eping @the World

요르단 여행 4: 페트라를 보다

WallytheCat 2018. 11. 21. 01:02

Peeping@theWorld/Days Traveling 2007/04/29 07:58 WallytheCat


1.2Km의 붉은 바위산 협곡(The Siq)을 걷다 보면, 그 멋진 협곡도 이제는 좀 지루하다 싶어질 때가 온다. 이것의 끝은 있는 걸까, 혹시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슬쩍 고개를 들면서. 그럴 때 어느 모퉁이 하나를 돌면, 페트라 관광 포스터에 등장하곤 하는 그 유명한 카즈네(Al Khazneh, The Treasury)가 난데없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며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암으로 된 바위산을 깎아 만든 이곳은 장례 사원으로 추정되며, 건축물의 2층에는 보물이 가득했을 것으로 짐작되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사원 정면 파사드는 높이 약 30m, 너비 약 25m 정도 크기다. 그 앞에는 제법 너른 광장이 펼쳐져 있다.

요르단 최고의 관광지인 페트라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마지막 성배'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라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아마도 카즈네가 그 촬영지 아니었던가 싶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게 한다. 커다란 입구 앞 계단에 잠시 넋놓고 쉬고 있는데, 경찰들이 바로 내 코앞에 와 말을 멈추더니 이야기를 시작한다. 덕분에 편하게 앉아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 얻었다.


페트라 초입부터 카즈네까지는,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마차를 운행한다. 카즈네부터 페트라 서쪽 끝 디에르(The Monastery) 까지는, 평평한 넓은 땅에는 낙타를 그리고 가파른 산 길에는 나귀들이 힘든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데 이용되고 있다. 그늘 한 점 없이 햇빛 쨍쨍 내리 쪼이는 왕복 10Km가 노약자, 어린이들에게 쉬운 거리는 아니므로 도움이 되기는 한다. 


<오늘은 정말 일할 기분이 아냐, 하며 아예 턱까지 넙죽 땅에 박고 쉬는 낙타가 보인다. 고단해 보인다.>


2세기 초 이곳을 지배한 로마인들의 원형극장이라 알고 있지만, 실은 로마의 영향을 받은 나바테아인들이 1세기에 지은 것이라 한다. 바위산을 반쯤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서 처음에는 3,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나 후일 7,000명까지도 수용이 가능하도록 늘려 지었다. 로마 극장들은 대체로 돌 벽돌을 쓰는데, 바위산이 널린 이곳에서는 그 특성을 살려 돌을 깎아 만들었으니 유례없이 독특한 원형극장이 되었다고나 할까.

페트라는 그 전성기 때 2만여 명이 거주하기도 한 도시였다. 지금으로서는 주거지로 쓰던 건축물은 발견된 바가 없으며, 현재까지 발굴되어 기록된 800여 곳, 그 중 무덤이 500여 곳 된다는 데, 이는 고대 페트라 도시 유물의 5%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직도 무궁무진한 유적이 파묻혀 있다는 의미가 되겠다. 





어쩌다 생소한 단어 하나를 알아 채고 배우게 되는 때, 묘하게도 같은 단어가 내 주위를 배회하며 여러 번 반복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마치 내가 그 의미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단어 뿐 아니라 장소, 이미지, 인물 등이 그렇기도 하지만.

페트라에 다녀 온 이후, 페트라에 관한 이야기며 미디어를 우연히 접하게 되는 때가 몇 번 있었다. 그 중 하나가 CNN에서 보여준 페트라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그 이야기가 바로 저 산 아래 찻집, 왕족 무덤이 올려다 보이는 전망을 가진 저 찻집 앞 노점에서 파는 책, 노점 주인과 연관된 이야기인 듯 싶다. 그 책을 팔던 저 노점이 그 집이 아닐까 짐작하지만, 100%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

이야기인 즉슨, 한 뉴질랜드 여자가 1978년에 페트라 여행을 하다 베두인 남자와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 페트라의 동굴에서 살았다. (지금은 모두 페트라에서 나가고 없지만 당시만 해도 베두인들이 페트라의 동굴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아이들도 꽤 여럿을 낳았는데, 후에 남편 모하메드가 병에 들어 죽고, 여자는 아이들을 데리고 모국인 뉴질랜드로 돌아가 살았다. 그녀의 큰 아들은 페트라로 돌아와 살고 싶어했다. 그래서 지금 페트라에서 베두인으로 남아 노점을 하는데, 거기서 엄마가 쓴 책, 'Married to a Bedouin'을 팔고 있다는 전설같은 한 베두인 가족 이야기이다. 




<사진 한복판에 지붕이 제법 기다란 찻집이 보인다. 그 찻집 길가의 노점이다.>




<베두인들이 나귀들을 대기시켜 놓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사람들과 흥정을 벌이려고 서 있다.
이 나귀들은 또 무슨 인연으로 이곳에서 종일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고된 일을 하게 되었단 말인가.>


<왕족 무덤 중, Urn Tomb의 감실을 통해 내다 본 풍경>

극장에서 페트라 서쪽을 향해 걸어가노라면 로마시대의 곧게 뻗은 도로(The Colonnaded Street)가 나온다. 고대 도시의 시장터, 즉 중심부였다. 지금은 몇 개의 열주와 문 정도만 그 흔적으로 남아있다. 그래도 왁자지껄했을 그 당시의 장면이 충분히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이 근처를 지날 때 미국 브라운 대학(Brown University) 고고학과에서 나와 발굴 작업을 진행하는 게 보였다. 



그곳을 지나면, 페트라 서쪽 산 정상에 있는 데이르(Al Deir, the Monastery)까지의 산 길이 기다리고 있다.
붉은 바위산 골짜기 사이사이를 오르며 구경하는 재미가 독특하다.



계속되는 오르막 길을 가다 보면 베두인들의 삶의 한 방식인, 이런 노점들이 자주 보인다. 뭐든 다 1JD 아니면 1달러에 판다며 큰 소리로 호객 행위를 하지만 "노, 땡큐" 하고 지나치면 그리 끈질기게 달라 붙지는 않는다. 



산을 오르다 당나귀에 빨간 플라스틱 통들을 싣고 내려가는 베두인과 만났다. 당나귀들은 제 갈 길을 잘 아는 듯 했다. 제법 빠르게 타닥타닥 익숙한 소리를 내며 척척 알아서 산을 내려 간다.


드디어 도시의 서쪽 산 꼭대기에 다다르자, 시원한 바람과 함께 거대한 크기의 데이르(The Monastery)가 나타난다. 암벽을 깎아 만든 2층의 건축물로 길이 45m, 높이 50m 정도 된다. 페트라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사원이다. 서기 1세기 말, 오보다스(Obodas) 왕에게 바쳐진 신전, 혹은 무덤으로 추정된다. 카즈네(Al Khazneh, the Treasury)와 닮았지만 조금 단순화시킨 양식으로 보인다. 데이르는 후일, 비잔틴 시대(4세기부터)는 아마도 교회로 썼을 것이라 본다. 





페트라 초입에서 카즈네까지 마차를 모는 스물한 살 청년이다. 페트라 이틀째 되는 날, 일행 중 힘들어 하는 어린이를 위해 이걸 타기로 했는데, 왕복 5Km에 20JD라는 비싼 요금을 내면서도, 이 녀석의 온갖 투덜거림을 들어야 했다. 서비스 정신이라곤 별로 없는, 불만에 가득 찬 청년이다.

왕복 모두 같은 마차를 타야한다는 규정 탓에 오후에 다시 그 얼굴을 봐야했다. 여전히 큰 소리로 불평을 늘어놓는 녀석에게 나도 같이 목소리를 높여 야단을 칠 것인가, 아니면 이야기를 받아주며 대화를 시도해 볼 것인가를 잠시 망설이다가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돈은 돈대로 내면서 마차꾼의 인생 상담까지 해 주다니, 뭔가 좀 밑지는 거래 같았지만, 다음 손님들을 위해서라도 해 보기로 했다.

이 청년의 이름이 뭐더라. 모하메드는 아니고 그 비슷한 이름이었는데, 자기 이름을 못 왼다고 여러 번 구박을 들었으면서도 또 잊어 버렸네. 아무튼 그도, 오늘날 페트라 바닥에서 꼬질꼬질한 엽서책을 들이밀며 '1 디나도 좋고 1달러도 좋다'를 외치는 아이들처럼, 아주 어려서부터 그런 일을 하며 잔뼈가 굵었단다. 영어도 길에서 일하며 배운 거란다. 학교는 가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글을 쓸 줄도 모른다고 했다. 아버지는 두 여자와 결혼을 해서 아이들이 도합 열둘이라던가 스물넷이라던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하여간 12의 배수였다고 기억된다. 이 청년은 그 중간 몇째 쯤에 끼어 있고. 자기는 정말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결혼도 안 할거다, 하게 되도 나이 오십이 넘어서나 할 거라나. 페트라가 정말 지긋지긋하다며, 자기의 꿈은 한국에 가는 거란다. 몇주 전에 한국에 가는 꿈도 꾸었단다.

한국에 가고 싶다면서 한국인한테 그리 불친절하면 되겠냐고 했더니, 그제서야 미안하다고 했다.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글쓰기를 배우면 너의 삶에 더 많은 선택권이 주어질 테니 그렇게 해 봐라,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하나만 낳아라, 그러면 결혼을 해서도 아버지처럼 살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냐, 뭐 대충 이런 충고를 해 주었던 것 같다. 글쎄... 스물한 살로도 보이지 않는 그 앳된 청년이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 나와의 대화를 되새김질 했을지 아닐 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팍팍한 그의 삶에 한 점의 위안이라도 되었기를 바래 본다.

(왕복 20JD의 요금은 이 베두인 마차꾼의 호주머니에 들어가지 않는다. 입구에서 공무원이 영수증을 끊어주며 요금을 챙긴다. 그러니 그 돈은 고스란히 정부측에 입고될 뿐, 이 마차꾼이 하루에, 아니 한 달에 몇 푼이나 받으며 이 마차 모는 일을 하는 지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