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s in Ohio

늙은 은행나무, 길을 환히 비추다

WallytheCat 2018. 11. 21. 01:08

Peeping@theWorld/Days in Ohio 2007/06/20 11:51 WallytheCat 




"그거 정말 예쁘다."
"그럼 가져요."
"아냐, 난 이제 귀찮아서 장신구 같은 건 안 해, 그렇죠, 여보?"
"근데 본인이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왜 남편한테 물으시는 거유, 어린애처럼?"
"지난번 가벼운 뇌일혈이 있은 후로 내 기억력에 자신이 없어서 물어봐야 할 때도 있단다."
"헉, 언제? 의사는 뭐래요?"
"별 거 아니라고, 하루에 아스피린 한 알씩만 먹으면 된다네."

모두 나이를 중후하게 먹어가면서 슬프게도 이런 게 일상 대화가 되었다. 누군 심장 바이패스 수술을 했고, 누군 심장도 아니고 방광에 페이스메이커를 단다고 했다. 전신을 캣스캔해도 의사가 병명을 찾지 못했다는 둥, 누구네 집 남편은 전립선암으로 수술을 했다는 둥, 누구는 어떤 장기를 얼마만큼 떼어내야 했다는 둥, 혹은 친척 누구는 어디가 아파서 얼만큼 앓다가 언제 죽었다는 둥...

얼핏 들으면 거의 공포영화 수준이다. 그러나 끼리끼리 모여 하는 이런 식의 대화가 더 이상 슬프지 않은 이유 하나가 있다면, 아무도 본인들의 심각한 병을 비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두 최소한 담담하거나 긍정적이다. 나는 이걸 나이먹는 것이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중이다. 



지난 주말. 여기는 아버지 날이었다. 생각같아서는 시아버님 댁에 다녀온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카드 한 장, 꽃다발 하나 우편으로 보내드리면 좋겠다 싶었는데, 이게 웬걸, 다시 모여야 한다는 거다. 멀리서 비행기로 날아온 형제도 있다. 모두 좋은 사람들인 거 알지만 대가족이 자주 모인다는 사실 자체가 아주 가끔 버겁다. 그래서 도착 전 잠시 이 늙은 은행나무 앞에서 숨고르기를 하고 싶어 차를 멈춰 세웠다. 은행나무는 여전히 거기 그 자리에 녹색을 한껏 뿜으며 서 있다. 



난 불행하게도, 은행나무가 미국에도 많이 있는지 몰랐었다. 나무가 많은 속에서 모두 초록인 여름이나 잎이 다 떨어진 겨울에 보면 쉽게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몇년 전 늦가을 어느 날, 이 시골 거리를 우연히 지나다 금빛으로 단풍든 늙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거리 전체를 환하게 비추고 있는 걸 우연히 보게 되었다. 쓸쓸하고 쌀쌀한 가을 날, 전혀 예상치 않았던 나무와의 반가운 만남이었다. 



나무는 정말 크다. 어른 두 사람이 팔을 벌려야 닿을 만큼. 나무는 얼마나 오래 여기 서 있었던 걸까. 수백 년쯤 되지는 않았을까. 지금까지는 이 은행나무에 관해 아는 사람을 아무도 만나지 못했지만 언젠가 만나게 될 수도 있으리라. 



<다른 종류의 나무가 이 늙은 나무에 싹을 틔워 자라고 있는 중이다.>




은행나무 건너편 길에는 이제 더 이상 기능을 하지 못하는 옛 카네기 도서관이 텅 빈 채 홀로 서 있다. 건물은 손을 보면 아름답게 다시 설 수 있을 테지만, '월마트 수퍼센터'가 장악해 버린 이 시골의 작은 타운에는 이미 쇠락의 기운만이 감도는 듯 하다. 유리창을 기어 올라간 담쟁이 덩쿨 조차도 새 것이 아니다. 그래도 유리창은 건너편 은행 나무를 한가득 담고 있다.

(카네기 도서관: 철강 사업으로 미국내에서 거부 중 하나였던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는 1800년대 말부터 1900년초 무렵까지 미국내 작은 타운들에 도서관 짓는 사업을 벌였다. 이 도서관도 그 일환으로 1920년 이전에 지어진 것이라는 남편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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