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s in UAE

근대국 한 그릇도 위로가 된다

WallytheCat 2018. 11. 21. 13:07

Peeping@theWorld/Days in UAE 2007/11/21 06:00 WallytheCat

 

일찌감치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가득한 설거지는 혹시 안 보는 사이에 요정이라도 나타나 살짝 해주고 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미뤄둔 채로, 세상에서 가장 편한 복장과 자세로 쉬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이 시간에 누구람. 이런 무방비 상태에서 현관문을 열어 보이기란 좀...

문을 여니 친구 하나가 서 있다. 금빛 고수머리는 물에 빠진 새앙쥐처럼 푹 젖어 있는 데다가, 커다란 두 눈은 눈물까지 가득 머금은 것 같이 심란하게 슬픈 꼴을 하고서. 젖은 머리와 젖은 눈동자는 전혀 별개의 문제지만 왠지 그 상황을 종합적으로 한 눈에 파악하려고 서두르자, 마치 젖은 눈동자 때문에 머리카락도 젖었을 것 같은 걸로 읽힌다. 

"너 웬일이냐, 그런 눈을 하고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라고 물었더니, 학교서 종일 사람들과 공간, 영역을 차지하는 문제를 중재하느라 결국은 모든 사람들과 얼굴을 붉히게까지 되었다는 거다. 학기 초에는 평화로워 보이더니 드디어는 모종의 자리 다툼이 시작된 듯 싶다.

동물들은 자신만의 정보를 담은 소변을 주위에 뿌리는 일로 영역을 표시하고, 그 영역을 침범 당하면 바로 발톱을 세우고 이를 드러내지만, 그보다 좀더 고매한 인간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도구로 일단 언어를 먼저 사용한다. 물론 본색을 더더욱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까지 치닫게 되면 마찬가지로 발톱을 드러내게 되는 경우가 흔하긴 하지만 말이다. 

여하간 그런 일로 종일 스트레스를 받은 데다 화까지 나서, 퇴근 후 수영을 아주 열심히, 오래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분이 풀어지지 않아 우리집엘 왔단다.

"저녁은 먹었냐?"
"아니, 아직. 걱정하지마. 집에 가서 먹지 뭐." 
"근대라는 야채를 된장국에 넣어 끓인, 건강에 아주 좋은 국에 밥 말아 먹을래? 먹어보고 맛이 좀 이상하다 싶으면 다 먹지 않아도 돼. 그럼 다른 거 찾아 줄게."

먹지 말라 그랬으면 울 뻔 했다. 너무나 맛있게 밥 두 공기를 비우는 것이, 아무래도 종일 굶으며 사람들과 씨름을 했던 모양이다. 친구는 뜨거운 국에 밥을 말아 먹고, 포도주 두어 잔을 마신 다음, 한참 수다를 떨다 기분이 풀어져서 갔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미련하게 밥까지 굶어가며 일을 하냐.

따끈한 국에 기분이 풀려 감동을 받았는지, 친구도 내게 따끈따끈 갓 도착한,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은 미술 잡지를 두어 권 빌려 주며 떠났다. 흠, 이런 귀한 걸... 훌륭한 잡지에서 영감을 마구 얻을 것 같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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