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s in UAE

아랍에미리트 연합국, 마흔 돌 맞다

WallytheCat 2018. 11. 24. 20:57

Peeping@theWorld/Days in UAE 2011/12/03 03:40 WallytheCat


12월 2일, 아랍에미리트 연합국이 탄생한 날이다. 1971년의 일이니, 어느 덧 마흔 돌이 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매해 요란스럽게 자축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올해는 마흔 돌을 맞았으니 그 준비를 하느라 한달 전부터 거리며 건물들을 장식하는 등 더더욱 요란스러워 보인다. 한 날 한 시에 함께 기념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일주일 내내 이곳저곳에서 산발적으로 기념식을 해댄다. 그러니 전국적으로 다 합치자면 얼마나 많은 기념식이 있었을까. 내가 일하는 대학도 단과 대학마다 다 따로 날을 잡아 기념을 한다.

올해는 12월 2일이 주말인 금요일이라, 11월 26일에 있던 무슬림 설날(Al Hijra)과 건국기념일(National Day)을 합쳐 12월 1일 목요일 하루를 국경일로 정해 사흘짜리 긴 주말을 보내는 중이다.

하루 조용하고 경건하게 쉬며 산뜻하게 한 번에 하고 말지, 일도 손에 안 잡히게 일주일 내내 소란을 떤다고 푸념을 했더니, 나와 친한 파키스탄인 동료가 그런다, "그건 네가 몰라서 그래, 그게 이 지역 사람들의 경축 방식이라는 걸. 치안도 안 좋고 전력 사정도 안 좋아 한 시간마다 전력이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는 파키스탄 조차도 8월 14일 있는 건국기념일 만은 공공 건물은 물론이고 집집마다 휘황찬란하게 네온 전구들을 매달아 확실하게 기념한단다." 이네들 방식인 걸, 내 뭐라 할 수는 없다만, 시끌벅적 요란한 것만은 사실이다.

아래 사진은, 학교서 학생들이며 직원들이 이 나라 국기에 든 네 가지 색 리본으로 장식해, 마치 한국서 떡 돌리듯 돌리는, 단 것들이다. 스위치를 켜면 불이 번쩍번쩍 들어오는 뱃지의 주인공은 샤자의 통치자이시다.




내가 사는 집 담장 너머에 있는 샤자 연구소 건물인데, 뉘 집 딸 시집 보낼 때의 장식만큼이나 화려하게 전등을 달아 장식했다. 



<Friday 12/2/2011, Sharjah, UAE>



네이버 백과사전을 뒤지니 아랍에미리트의 흥미로운 역사가 상세하게 나와있어 소개한다:

아랍에미리트의 카와심족(族)은 해양민족으로 예로부터 어업과 해운업에 종사해 왔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이 이 나라의 해안에 첫 발을 내딛였으며, 17세기에는 네덜란드와 영국 해군이 인도양의 제해권을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바다를 중심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주민들은 해상에서의 전통적인 생업에 종사할 수 없어 해적으로 전락하였다. 19세기 초에는 와하비(사우디아라비아의 모체)의 보호 아래 유럽 세력에 대항하는 해적행위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영국은 1806년부터 무력으로 해적을 격파하기 시작하였으며, 1818년에는 해적의 본거지 라스알카이마항(港)과 당시 ‘해적해안’이라고 불리던 연안 항구들을 정복하였다. 1820년에는 각 토후국의 수장(首長)들과 평화조약을 맺어 해적행위와 노예무역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평화조약이 이행되지 않자 영국은 1835년에 6개월 기한으로 해상휴전협정을 체결하였으며, 그후 다시 기한을 갱신하여 이 지역을 ‘휴전해안’이라 불렀다. 결국 협정은 1853년에 이르러서야 항구적인 해상휴전조약으로 바뀌었다. 이 조약으로 각 토후국들은 영국의 실질적인 보호국이 되었지만, 영국은 토후국끼리의 육상교전에는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1820년에 5개국이었던 토후국들은 흥망과 집산을 되풀이하였다. 1892년에는 영국 이외 나라들과의 자유로운 교섭이 금지되었고, 이로 인해 아랍의 다른 지역과의 관계가 약화되면서 아랍에미리트는 영국령 인도와 경제적으로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이 결정되던 해인 1948년에는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되었다. 이에 영국은 1952년 이 지역에 자국 장교가 지휘하는 군대를 창설하고 연방평의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석유 산출로 부유해지기를 꿈꾸는 토후국의 수장들은 정치적 통합에는 관심이 없었다. 1955년 아부다비와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 일어난 부라이미 오아시스의 영유권 분쟁은 석유에 얽힌 영토분쟁이었다. 1958년에 아부다비의 석유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65년에는 영국이 바레인·카타르·아부다비에게 출자하도록 하여 개발기금을 창설하였다.

1965년 아랍연맹에 아랍에미리트 문제 상임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당시에는 바레인과 카타르도 포함시킨 연합국이 구상되었다. 1966년에는 ‘연합국 헌법제정 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영국은 아덴을 대신할 군사기지를 샤르자에 설치하였으나 1968년 초에는 이 지역의 군대를 1971년 말까지 철수하겠다고 발표하고, 그때까지 연합국을 실현시킬 방침을 정하였다. 같은 해에 바레인과 카타르를 포함한 9개 토후국의 수장이 참석한 첫 번째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상호불신과 대립으로 인하여 원활한 교섭 진전이 없었으며, 결국 1971년 여름 바레인과 카타르가 단독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해 11월 말 영국군이 철수하자 때를 같이하여 이란이 호르무즈해협의 샤르자와 라스알카이마령의 작은 섬을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란과의 협정에서 샤르자는 연합국에 참여할 뜻을 밝혔으나, 라스알카이마는 거부하였다. 따라서 라스알카이마를 제외한 6개 토후국(Abu Dhabi, Ajman, Fujairah, Sharjah, Dubai, Umm al-Qaiwain)만으로 구성된 아랍에미리트가 1971년 12월에 탄생했다. 라스알카이마(Ras Al Khaimah)는 얼마 뒤인 1972년 2월에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

[출처] 아랍에미리트의 역사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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