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eping@theWorld/Days in UAE 2008/05/02 05:33 WallytheCat
지난 해 연말 내가 주문한 스카프 염색 작업을 할 시간을 도무지 낼 수 없었다며, 그 비슷한 분위기를 내는 긴 스카프 석 장을 가져왔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내가 주문한 게 어떤 거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원하는 게 없으면 돈으로 돌려주겠다며 친구는 몹시 미안해 한다. 작업할 시간이 없이 바쁜 게 어떤 건지 모르는 바 아닌데다, 서로 작품 하나씩을 바꿔 가지고 싶었던 게 애초의 의도였으므로 다시 환불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이 가을 냄새 물씬 나는 긴 실크 스카프 하나를 골랐다.
이곳에 잠시 와 있는 동안 그 친구의 생일이라고 누군가 내게 귀뜸을 해 준다. 친한 친구라면 생일을 챙기는 것쯤 해줘야 하지 않는 거냐며 옆구리를 찌른다. 혹시나 싶어 친구의 어머니께 몰래 이메일로 여쭈니 그 날이 그 날 맞다는 거다. 생일 챙겨주는 것쯤이야 별 일이 아니지만 문제는, 만나면 서로 껄끄러워 하는 사람들을 같은 장소에 불러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거였다.
사람의 관계라는 게 어디서 뭘 먹으며 뭘 하며 살든 별반 다르지 않은지라, 처음에는 모두 호의를 가지고 잘 지내는 듯 싶다가도 시간이 조금 흘러 나름 대략의 상황이 판단되고 이해가 개입된다 싶으면, 감추어 둔 발톱을 쉽게 드러내곤 하며, 관계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배려가 사라진 관계란 전혀 봐줄만 하지 않다.
이 모두가 험한 세상을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이라 치부하고 말긴 하지만, 많은 경우 게임의 경계를 훌쩍 넘은 거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게임에 몰입하다 보면 게임 본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게임을 위한 게임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일종의 중독 상태다. 어찌 되었거나 게임을 위한 게임, 이건 내게 삶을 너무 지치고 재미 없게 한다.
한 이틀 무척 고민을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한 곳에 모아놓고 보자 싶어, 난 정말 순진해서 사람들 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저 다 불러 오라고 했다. 생일이라 모인다는 데야 거절할 수 없던 부분도 있었으리라. 의외로 부른 사람들 모두 모여, 잘 먹고 잘 놀다 밤늦게 돌아갔다. 그만하면 괜찮은 생일 파티였다.
생일상 차려줘 고맙다며 이 스카프 하나를 더 내게 선물로 주고 친구는 다시 떠났다. 이 스카프를 볼 때 내 눈이 반짝 했다나. 친구는 떠나고, 가을빛 물씬 나는 스카프 한 장과 추운 겨울날 따뜻하게 두를 벨벳 댄 스카프 한 장만 약간의 묵은 향을 내며 그림자처럼 내 곁에 남았다.
요즘 이곳 날씨는 대략 섭씨 36도쯤 되는데... 이 스카프 두를 날은 언제나 올까 모르겠다.
'Days in UA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일곱 살 우정에 내기를 걸다 (0) | 2018.11.21 |
---|---|
강우량이라 했느뇨 (0) | 2018.11.21 |
오늘의 운세, 길을 심하게 잃을 것이여 (0) | 2018.11.21 |
염소를 모는 염소 (0) | 2018.11.21 |
여름으로 접어들다 (0) | 2018.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