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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위 두 마리

기후 변화로 따뜻해진 겨울 탓일까. 언제부터인가 겨울이 되어도 남쪽으로 이동하지 않는 거위들이 허다하다. 내가 일하는 건물 근처에 있는 집 앞이나 은행 건물 앞 주차장 등지에서 지난 겨울부터 종종 시끄럽게 영역을 주장하고 정비해 오던 거위 두 마리가 있다. 두 마리가 암수 한 쌍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대략 그래 보인다는 건 거위 세계에 관해 잘 모르는 내 선입견일까. 그들로 보이는 거위 두 마리가 며칠 전 아침, 빠르고 음산하게 움직이는 비구름을 배경으로 건물 꼭대기 모서리에 서서는 나의 출근길을 떡하니 내려다보는 게 아닌가. 기이한 풍경이었다. 플로리다에 플라밍고가 있다면 오하이오에는 거위가 있다는 듯, 목을 길게 빼고 너무도 당당하게 서서 내려다보는 거위의 시선을 느끼며 좀 무섭다는 생각..

Days in Ohio 2022.03.26

겸사겸사 대청소

삼월 두 번째 주, 산 넘고 물 건너는 먼 길을 마다 않고 친구 가족이 방문했다. 2016년 초가을, 서울서 스치듯 잠깐 만나 점심을 먹고 헤어진 이래 처음 보는 것이니 설레고 반가운 마음 앞섰지만, 팬데믹 이후 처음 집으로 손님을 맞는지라 이런저런 걱정도 되었다. 뭐니 뭐니 해도 손님맞이의 준비는 청소와 빨래로 시작하고, 손님이 떠난 후 역시 청소와 빨래로 마무리 되는 것 아니겠는가. 세탁을 해서 보관을 했던 것이긴 하지만 벌써 몇 년 전이었을 것이니, 이부자리 빨래를 새로 했다. 빨래야 세탁기가 해주는 거지만 게으른 몸을 움직여 안 쓰던 빈 방들의 묵은 먼지를 털어내는 청소는 내게 늘 하기 싫은 숙제다. 안경 끼고 천장 구석구석을 들여다 보니 먼지는 물론이고 마치 영화 속 장면을 연상시키는 거미줄까지..

Days in Ohio 2022.03.21

산 너머 산, 그 뒤 반전

악천후 덕에 이틀 잘 쉬고 토요일 아침 출근길에 나섰다. 큰길의 눈은 다 치워져 있어 괜찮았다. 별생각 없이 일터의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연히 깨끗이 치워져 있을 것을 예상했건만 무슨 일인지, 이틀간 내린 얼음비며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종일 사람들이 드나들며 써야 하는데, 이를 어쩐다. 선택은 두 가지다. 다시 하루 일하기를 포기하느냐, 아니면 사무실에 있는 빗자루로라도 문 앞을 대충 치우고 일을 하기로 하느냐다. 또다시 일을 포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기에,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남편이 밖으로 나가 빗자루로 눈을 치우고 있는데, 앞에 제설기(snowplow)를 장착한 SUV 한 대가 지나가다 잠시 돕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자동차 몇 대 공간 정도 치워줄 걸로 예상..

Days in Ohio 2022.02.07

Snow Day

이번 주중에 있을 악천후에 관한 예보는 이미 지난주부터 들었다. 지금까지 오하이오주는 별 말썽 없이 겨울이 평탄하다 싶더니만 역시나 겨울은 겨울이었던 게다. 어제는 영상의 기온에서 종일 비가 내렸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어젯밤부터 기온이 내려가더니 목요일인 오늘 아침부터는 내리는 비가 바닥에 닿으며 얼어붙는 거다. 얼음이 탄탄하게 잘 언 바닥 위에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한다. 도로 사정으로는 최악의 상황 아닌가 싶다. 결국은 출근하기를 포기하고 집에 있기로 했다. 학교들 역시 문을 닫았다고 들었다. 악천후로 출근을 못하는 날이 날이면 날마다 오는 날이 아니니, 귀한 날이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저 놀기로 했다. 가볍게 낮술도 한잔하고, 종일 벽난로에 불도 때며 완..

Days in Ohio 2022.02.04

휴일 아침

이번 겨울 들어 세 번째 눈인 것 같다. 두어 번 모두 가볍게 땅만 덮은 정도였다. 어젯밤 가볍게 내린 1인치의 눈이 다인 줄 알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제법 쌓여 있다. 2.5인치 정도라 했다. 마틴 루터 킹 데이(Martin Luther King Jr. Day) 휴일 오전이라 그런지 밖에는 산책하는 사람 하나 없다. 저 멀리 한 집만 사람이 나와 눈을 치우는 게 보였고 그 외 집들에는 눈 위에 발자국 하나 보이질 않는다. 수분이 많지 않은 눈이라 치우는 데 그리 힘들 것 같진 않다. 아직 내릴 눈이 남아 있는지 밖은 몹시 우중충하다. 그 창을 통해 사진을 몇 장 찍고 보니, 마치 복사라도 해 붙인 것 마냥 예년과 별다른 것 없어 보인다. 지난 일 년의 시간이 그대로 멈췄던 것은 ..

Days in Ohio 2022.01.18

욕실 단장, 하나 더

욕실 공사를 직접 하며 배운 게 많다. 고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낡은 것을 해체하고 걷어내야 하는 지난하고 재미없는 일차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몇 번 뜯어본 후로는 뜯어내는 일이 겁 나기도 한다. 세월의 흐름에 따른 자연적 노후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만, 엉터리 공사로 대충 마감해 덮어 놓은 장면들을 목격할 때면 씁쓸하기도, 화가 나기도 하니 말이다. 엉터리 공사를 해놓은 곳은 일이 몇 배 많아지고 복잡해짐은 물론이다. 공사를 했던 이가 누구인지도 아는 경우, 그 사람을 기억에 떠올려야 할 때는 다소의 괴로움과 용서의 과정까지도 수반한다. ㅎㅎ 마지막 남은 샤워실 수리를 시작할 때, 금이 간 바닥 타일 몇 개를 뜯어내고 새 것으로 교체할까 말까를 두고 고민을 했다. 단지 작은 타일 몇 개를 교체..

Days in Ohio 2022.01.03

욕실 새 단장, 미치지 않고서야

지난 시월 말 일주일 휴가를 냈었다. 앞뒤 주말을 끼니 꼭 열흘이 되었다. 몇 달 전 휴가 날짜를 정했을 때는 철 지나 인적이 드문 바닷가 어디로 여행이나 다녀올까 싶었다. 막상 시일이 다가오자 설레기는커녕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고양이들을 돌봐줄 적당한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것은 물론, 여행지를 찾고, 숙소를 찾고, 짐을 챙겨 떠나야 하는 일련의 과정이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이런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여행은 무슨 여행인가 싶어 쉽게 포기가 되었다. 길어지는 코로나바이러스 시국이 날 완전 집순이로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여행을 포기하는 대신 뭔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내는 일을 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전혀 해보지 못한 새로운 일, 몸은 힘들어 고달픈데 일의 과정을 지켜보며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일 같은 거 ..

Days in Ohio 2021.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