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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풀리다

다시 겨울로 되돌아갈 듯 그리 쌀쌀하더니 어제부터 날이 풀렸다. 날 풀리고 해가 나니, 어정쩡 멈춰있던 튤립들도 어찌 더 활짝 꽃을 피워보려고는 하나 이미 시작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던 지라 부서지고 깨진 꽃들 투성이라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다. 내가 원하던 보랏빛꽃은 딱 한 송이가 피었는데, 비바람에 꽃대가 꺾여 마치 할미꽃 같다. 관상용 꽃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농사이기라도 했다면, '올 튤립 농사는 정말 폭망 했구나' 싶어 절망했을 거다.

Days in Ohio 2023.05.06

쌀쌀한 봄, 그래도 꽃을 피우려

지난 닷새 내내 비도 매일 내리며 으슬으슬 추웠다. 낮 최고기온이 화씨 45도(섭씨 7도)쯤 되었던 것 같다. 이틀 전인 월요일 밤에는 비가 눈으로 변해 내릴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들었다. 5월에 눈을 다 보겠다 싶었는데, 눈은 내리지 않았다. 두어 주 전부터 수선화는 사라져 가고, 튤립이 올망졸망 자라며 꽃망울을 맺기 시작했다. 바람 불고 추운 날이 계속되니 튤립이 그 상태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머물러 있는 게 보인다. 모두 보라색이나 혹 그 비슷한 색인줄 알고 심었던 튤립이 예상치 못한 알록달록한 색들이라서 좀 놀랐다. 게다가 새로 나온 꽃을 대여섯 개 사슴이 먹어치우기까지 해 심히 마음이 아프다. 수선화는 먹지 않더니, 튤립은 사슴이 먹을 수 있는 꽃인 모양이다. 활짝 핀 튤립도 곱..

Days in Ohio 2023.05.04

어영부영 봄

밝은 노란색이 내 취향은 아니지만, 다른 꽃이 피기엔 아직 이른 때, 칙칙한 회색 앞마당을 단번에 환하게 밝혀 주니 나도 모르게 자꾸 노란색 수선화 무리에 눈길을 주었던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수선화를 봄의 전령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몇 주 그렇게 등불같이 주위를 환하게 밝히던 수선화가 시들기 시작하자 주위 다른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노란 수선화가 거의 다 시들 즈음 난데없이 흰색 수선화가 딱 한 송이 피었다. 군계일학이란 사자성어가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어여쁘기도 하여라. 비죽비죽 땅을 비집고 올라오던 튤립에도 꽃망울이 맺힌 게 보인다. 며칠 후면 스물 다섯 송이의 튤립을 보게 되겠지. 보라색인 줄 알고 심었지만 또 어떤 색의 꽃들이 피어나게 될지는 일단 나와봐야 알 것 같다.

Days in Ohio 2023.04.24

긴 의자 덮개

왕년에 새것이었을 때는 현관 앞에 두고, 앉아서 신발을 신거나 벗는 용도로 쓰이다가, 좀 낡은 상태가 되자 버리기에는 아까워 지하실로 내려 보내 재봉질 때나 쓰이는 벤치다. 지하실로 내려 보낼 때만 해도 좀 낡은 정도였는데, 내가 모르던 사이 지하실에서 고양이들에게 박박 긁히기 딱 좋은 가구였던 모양이었던지, 세상에나, 네 모서리마다 발톱에 긁힌 자국이 현란하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마침 넉넉하게 사 둔 인조가죽이 있어 덮개를 한번 만들어 보기로 했다. 네 귀퉁이 모두 똑같은 길이에 90도 각도를 딱딱 맞추고 늘어짐 없이 반듯하게 재봉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서너 번 박았다, 뜯었다를 반복하다 보니 대충 괜찮아 보이는 시점이 도래했다. 머지않은 미래에 어차피 구석마다 또 긁힐 것은 뻔한..

Days in Ohio 2023.03.21

수선화

수선화, 매년 봄이면 앞마당 구석에 나지막이 겨우 몇 송이 피어 봄이 오기 시작했음을 알리던 꽃에 불과했다. 매년 보던 그 꽃이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수선화임을 알았을 때, 꽃의 생김새가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생뚱맞아 보여 살짝 배신감까지 드는 거였다. 영문 이름(Daffodil)의 발음은 또 수선화(水仙花)란 어여쁜 이름과는 전혀 다르게 또 어찌 그리 안 어여쁜 느낌을 주는 것인지, 소리 낼 때마다 한 호흡 멈춘 다음 말하게 된다. 작년 늦여름, 상점에서 튤립 구근을 살 때 단지 그 옆에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내 손에 들게 되었다. 나도 왜 덥석 수선화 구근을 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예측 불가능한 날씨 덕에 구근 50개로 땅속에 있던 수선화는 2월 중순에 이미 정신없이 잎을 내기 시작하고 ..

Days in Ohio 2023.03.12

윈드차임

뒷마당 어디쯤, 묵직하게 깊은 소리를 내는 윈드차임 하나를 두고 싶은 마음을 오랫동안 지니고 있긴 했다. 얼마 전 아마존을 뒤져 보니 파이프 외경이 30.5mm 되는 것들은 가격이 제법 비쌌다. 하나 만들어 볼까도 생각했지만, 윈드차임 하나를 만들자고 알루미늄 파이프 등 재료를 여기저기서 구하는 것도 어수선한 낭비 같아 방법은 아닌 듯싶었다. 재료만 사놓고 그걸 또 언제 만들지는 기약이 없을 수도 있으니, 역시나 아니다 싶었다. 한데 며칠 전 장을 보러, 한 달에 한두 번쯤 들르는, 대형 마트에 갔더니 파이프 외경이 38mm인 듬직해 보이는 윈드차임이 떡하니 내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게 아닌가. 가격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 혹여나 묵직한 윈드차임이 유리창으로 날아와 유리가 깨지는..

Days in Ohio 2023.03.06

일러도 너무 이른

내내 춥다가 요 며칠 난데없이 낮 최고기온이 화씨 70-73도(섭씨 21-23도)까지 올라 덥기까지 했다. 반짝 따뜻해진 날씨에, 얇은 여름옷을 입고 길에 나와 달리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겨우내 움츠리고 있다가 이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편도 달리기에 완벽한 날씨라며 나가서 실컷 뛰다 들어왔다. 퇴근길에 언뜻 본 마당에는, 작년 가을 심은 수선화와 튤립 구근들이 시방 땅을 비집고 마구 싹을 틔우시는 중이다. 당장 오늘밤부터 기온이 다시 영하로 떨어진다는데, 모두 얼어버리면 이를 어쩌나. 새싹을 반기는 마음이 들기는커녕 불안 불안한 마음만 앞선다.

Days in Ohio 2023.02.17